본문 바로가기
※ Soy 한국사 ※

[조선] 9. 임진왜란 (사천 전투, 정유재란, 이순신, 의병, 행주대첩, 진주대첩, 광해군의 중립외교, 인조반정, 비격진천뢰, 판옥선, 해전도, 공명첩, 거북선, )

by 소이나는 2012. 5. 15.
반응형

 

 

 

 

 

 

 


Ⅰ. 왜군의 침략

 

 1. 왜란 전의 정세

  (1) 조선

   1) 국방력 약화 - 16세기 이후

    a. 5위제 붕괴- 갑사들의 녹봉 중단 등으로 군인의 질적 저하

    b. 방군 수포제 시행 - 정군의 수 감소

   2) 16세기 이후 침략 격화

    a. 삼포 왜란 (1510)

    b. 을묘왜변 (1555)

   3) 대응 - 비변사 설치, 이이의 10만 양병설은 채택되지 못함

  (2) 일본

   1) 통일 - 도요토미 히데요시 (풍신수길)

   2) 통일 직후 제후들을 견제, 분산하기 위해 침략

   3) 정명가도 - 명을 치러 가는데 길을 열어 달라


 2. 왜란의 발발

  (1) 침략 - 1592년 4월 : 부산진, 동래성 - 정발과 송상현이 분전 끝에 함락

  (2) 북상

   1) 신립의 패전 - 충주에서 배수의 진

   2) 선조의 피난 - 평양, 함경도까지 침입

  (3) 2개월 남짓 참패 후 조선군 우세

   T) 왜란 초기 쉽게 패 - 관군이 유명무실한 원인?  방군수포법의 실시 (군역 면제해 주고 면포로 수취)

  
  
  [임진왜란 발발]


Ⅱ. 수군의 승리 (이순신의 활약)

 1. 전라좌수사, 판옥선, 거북선

 2. 옥포 해전 - 첫 승리

 3. 사천 전투 - 거북선 최초 사용

 4. 당포·당항포 해전 -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경상 우수사 원균이 합세

 5. 한산도 대첩 - 학익진

 6. 안골포 해전 - 제해권 완전 장악, 서해 진출 차단

 7. 부산포 해전

 8. 이순신의 3대첩 - 한산도대첩, 명량 대첩, 노량해전

 

 cf. 우리 역사상 3대 첩 - 살수대첩, 귀주 대첩, 한산도 대첩

     왜란의 3대 첩 - 한산도 대첩, 제1차 진주성 전투 (김시민), 행주 대첩 (권율)


 ☞ 명량대첩

   「병법에 이르기를, “꼭 죽으리라 결심하고 싸우면 살 것이요, 꼭 살리라 마음먹고 싸우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한 사람이 길목을 지켜 내면 넉넉히 천 사람도 두렵게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들 모든 장병들은 조금이라도 영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으로 다스려

     작은 일이라고 용서치 아니할 것이다.」


 ☞ “~ 적장 소서행장은 평양에 이르러 글을 보내 말하기를, ‘일본의 수군 10만여 명이 또 서해로부터 올 것입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대왕의 행차는 이로부터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하였는데~”

     밑줄 친 부분과 같은 사실이 임진왜란 때 나타나게 된 직접적인 배경은?

     ➝ 이순신의 승리로 왜의 수륙 병진 작전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해전도]

 
 [판옥선]                                                                              [거북선]


   
   [이순신 장군]


Ⅲ. 의병의 항쟁

 1. 봉기 - 농민이 주축, 전직 관리, 사림 양반, 승려

 2. 관군에 편입

 3. 곽재우 - 경상도 의령 - 진주에서 김시민과 활약 (북인), 최초의 의병, 천강홍의장군

 4. 김천일 - 전라도 나주 - 진주 혈전

 5. 조  헌 - 충청도 옥천, 청주 - 700의총 - 승장 영규와 합세, 금산에서 고경명 등과 전사

 6. 고경명 - 전라도 담양, 장흥 - 금산에서 전사

 7. 정문부 - 함경도 경성, 길주

 8. 김덕령 - 전라도 담양 -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사망

 9. 유  정 - 금강산 - 사명당이라 불림, 포로쇄환사로 일본에 건너감

10. 휴  정 - 묘향산 - 서산대사라 불림 - 제자로 영규, 유정이 있다.

11. 이정암 (연안), 김면 (고령), 정인홍(합천), 권응수 (영천), 김해(예안), 고종후(담양), 홍계남(안성), 우성전 (강화),

    영규(의승) - 공주, 금산 전투에서 사망



[관군과 의병의 활동]

cf) 동사강복 (오운) - 왜란 때 경상도에서 의병에 참여 했던 경험을 살려 역대 애국명장의 활약을 드러내고 있따.

 

 


 

Ⅳ. 전란의 극복

 

 1. 전세의 전환

  (1) 배경 - 수군의 승리, 명의 참전

   1) 조승훈 차 구원 실패

  (2) 반격

   1) 평양성 탈환 - 조명 연합군과 휴정, 유정, 유성룡 + 이여송 명군

   2) 행주 대첩 (1593)

   

 2. 왜란 중의 군비 강화

  (1) 중앙군 - 훈련도감을 설치 삼수병(포, 사, 살수) 양성

  (2) 지방군 - 속오법 실시 - 속오군(양반, 노비)

  (3) 군비 보강 - 화포 개량, 조총제작


 3. 정유재란 (1597)

  (1) 재차 침입

  (2) 직산 소사평 전투 (vs 구로다군)에서 승리

  (3) 명량 대첩

  (4) 칠천량 해전 - 원균 대패, 전사

  (5)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과 철군

  (6) 노량 해전 -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


cf) 조선시대 군사제도 = 잡색군(전기 특수군) → 속오군(세조)→ 훈련도감(선조) → 장용영(정조) → 별기군(고종)

 

 T) 왜란 후 도쿠가와 막부의 강력한 요청을 받아들여 국교를 재개







Ⅴ. 왜란의 영향

 

 1. 왜란의 승리 요인

  (1) 민족의 잠재적 역량 우월 - 전 국민적 차원의 국방 능력은 능가

  (2) 문화적 우월감

  (3) 무기와 전술의 우수 - 비격진천뢰(이장손) / 화차(변이중) 등 무기 발명


 2. 국내적 영향

  (1) 비변사 기능 강화 - 의정부 유명무실

  (2) 3사의 언론 기능이 붕당의 이해를 대변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3) 인구 감소, 국가 재정 감소

  (4) 담배, 고추, 호박, 토마토 전래

  (5) 납속책·공명첩 시행 (공명첩 - 부유층으로부터 돈이나 곡식을 받고 팔았던 명예직 임명장)

     * 납속책, 공명첩 - 정부의 재정 확보책의 하나로 신분이나 직첩을 매매하여 합법적으로 신분을 상승하는데 영향 

        
           [공명첩]

  (6) 이몽학이 민란 봉기

  (7) 불국사, 경복궁 사고 등 소실 (전주사고는 보존), 창덕궁·창경궁도 소진

  (8) 존화사상 고조, 실학 태동

  (9) 관우 숭배 사상 전래, 숭명사상 강화

  (10) 군사

     1)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얻어 ‘절강무예’ 조련

     2) 훈련도감 설치

     3) 진관체계 복구

     4) 속오법 실시

     5) 비격진천뢰, 화차, 조총


      
     [비격진천뢰]

 3. 국제적 영향

  (1) 여진족의 흥기 - 명과 청의 교체

  (2) 일본 중세 문화 발전 - 성리학, 출판술, 도자기 문화 발달의 토대 마련

    1)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함 - 이삼평, 심당길

    2) 강황 - 제2의 왕인으로 평가, 「강양록」(기행문)

  (3) 도쿠가와 막부 성립

  (4) 기유약조 체결

  (5) 명·청 교체



[왜란, 재란]

1592 4월 - 침략, 곽재우, 조헌 의병

      5월 - 서울 함락, 거북선 처음 이용

      6월 - 평양 함락, 명 원군 1진 도착

      7월 - 한산도 대첩(이순신), 휴정의 승병

      8월 - 금산 전투 (조헌, 영규 전사),  명 일본과 화친 교섭 (심유경)

     10월 - 진주 대첩 (김시민)

     12월 - 명군 2진 (이여송) 도착

 

1593 1월 - 평양 수복 (휴정, 이일, 유성룡, 이여송

      1월 - 벽제관 전투 - 이여송 패전

      2월 - 이치전투 (금산 근처), 군율

      2월 - 행주 대첩 (권율)

      4월 - 서울 탈환

      5월 - 명, 도요토미와 화친 논의 (심유경)

      6월 - 진주성 함락 (김천일, 논개 전사)

 

1594 2월 - 훈련도감 설치

     11월 - 속오군 편성

 

1596 7월 - 이몽학, 홍산에서 난

      8월 - 김덕령 옥사 (이몽학의 난 연루)

      9월 - 도요토미, 조선 재침

 

1597 1월 - 정유재란

      2월 - 이순신, 무고로 하옥

      3월 - 명군 2차 출병

      7월 - 원균 전사, 이순신 삼도 수군통제사 임명

      9월 - 명군 직산에서 일본군 대파, 명량대첩

 

1598 8월 - 도요토미 사망 후 철수

     11월 - 노량해전 이순신 전사, 일본군 철수

 

   


Ⅵ. 광해군의 중립 외교

 

 1. 광해군의 내치

    - 북인 정권이 성립, 부국책, 강병책, 문화시책 (동의보감, 허준)


 2. 광해군의 대외 정책

  (1) 후금 건국 - 누르하치 (1616)

  (2) 명의 원군 요청

  (3) 중립 외교

      ☞ “화친을 맺어 국가를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의를 지켜 망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신하가

          절개를 지키는 데 쓰이는 말입니다. ~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큰소리를 쳐서 오랑캐들의 노여움을

          도발하여, 마침내는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된다면 그 허물이 이보다

          클 수 있겠습니까?”   <지천집>

  (4)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명을 지원, 상황에 따른 대처 명 - 사르흐 전투에서 패

  (5) 조명 연합군의 후금 군에 패배, 금과도 친선으로 중립적 정책 추진

  (6) 일본 - 기유약조 : 세사미두 100석, 세견석 20척                                                                                     - soy 한국사


 3. 인조반정 (1623)

  (1) 광해군의 현실적이고 실리 있는 외교 정책은 복구에 큰 기여 그러나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등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약점

  (2) 서인이 주도한 반정 (이괄, 김류, 이귀)

  (3) 인조

   1) 서인 정권에 남인 참여

   2) 호위청, 어영청, 총융청 설치

   3) 서원을 중심으로 공론 형성

   4) 산림의 영향력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