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나라가 삼국(三國)을 통일한 이래 47년간을 사졸(士卒)이 편안히 잠자지 못하고 군량(軍糧)이 소진됨을 면치 못한 것은, 서북(西北)지방이 오랑캐와 인접(隣接)하고 있어 방어하는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이것을 염두에 두소서. 마헐탄(馬歇灘)으로써 경계(境界)를 삼은 것은 태조의 뜻이었고, 압록강가의 석성(石城)으로 경계를 삼은 것은 대조(大朝)의 정한 바입니다. 바라건대, 요해지(要害地)를 가려서 국경을 정하고, 토박이 사람으로 활 잘 쏘고 말 잘 타는 자를 선발하여 그 방어에 충당하고 또 (그 가운데서) 편장(偏將)을 뽑아 통솔하게 한다면, 경군(京軍)은 번갈아 수자리[戌]하는 노고를 면하게 되고, 마초(馬草)와 군량은 (그) 운반하는 비용을 덜게 될 것입니다.
1. 사사로이 듣건대, 성상께서 공덕재(功德齋)를 베풀기 위하여 혹은 친히 다(茶)를 맷돌에 갈기도 하고 혹은 친히 보리를 갈기도 한다 하니, 신은 성상의 수고로움을 매우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폐단은 광종(光宗)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이고는 (그) 죄업(罪業)을 제거하려고,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짜내어 불사(佛事)를 많이 베풀어, 혹은 비노자나(毗盧遮那) 참회(懺悔) 법회를 열기도 하고, 혹은 구정(毬庭)에서 중[僧]들을 재공(齋供)하기도 하고, 혹은 귀법사(歸法寺)에서 무차 수륙회(無遮水陸會)를 열어 부처에게 재(齋) 올리는 날을 당할 때가 되면 반드시 걸식(乞食)하는 중에게 밥을 먹이기도 하고, 혹은 내도량(內道場)의 떡과 과일을 걸인(乞人)에게 내어 주기도 하며, 혹은 신지(新池)•혈구(穴口)와 마리산(摩利山) 등처(等處)의 어량(魚梁)을 방생소(放生所)로 삼아, 한 해 동안에 네 번이나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 지역 사원(寺院)에 나가서 불경(佛經)을 강연하고, 또 살생(殺生)을 금하여 어주(御廚)의 고기 반찬을 저자에서 사서 바치게 하였으며, 대소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모두 참회(懺悔)케 하고 미두(米豆)•시탄(柴炭)•마료(馬料)를 운반하여 서울과 지방의 길가는 사람에게 베풀어 준 것 등 (그 폐단을) 이루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참소를 믿어 사람 보기를 초개(草芥)처럼 여겨 베어 죽인 것이 산더미와 같이 쌓인 데다가, 항상 백성의 고혈(膏血)을 다 짜내어 재를 올리는 데 이바지하였으니, 부처가 만약 영험이 있다면 어찌 즐거이 공양(供養)에 응하겠습니까? 이러한 때를 당하여 (자식이) 아비를 배반하고 (종이) 주인을 배반한 자들은 모양을 바꾸어 중이 되었고, 심지어 떠돌며 구걸하는 무리들이 와서 여러 중과 더불어 서로 섞여서 재(齎)에 참석하였으니,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원컨대, 성상께서는 군왕의 체통을 바로 잡아 유익함이 없는 일을 하지 마소서.
1. 우리 조정의 시위(侍衛)하는 군졸(軍卒)이, 태조(太祖) 때에 있어서는 다만 궁성(宮城)을 숙위(宿衛)하는 데에만 충원하였기 때문에 그 수효가 많지 않았습니다. 광종(光宗) 때에는 참소를 믿어 장수와 정승을 처벌하고, 스스로 의혹이 생겨 주군(州郡)에서 풍채(風彩)가 있는 자를 뽑아 입시(入侍)하게 하였는데, 당시의 의논은 번거롭기만 하고 유익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경종 때에 이르러서는 비록 조금은 삭감되었다고 하나, 그 수효가 아직도 많았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태조(太祖)의 법을 따라서 단지 날쌔고 용맹스런 자만 남겨 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혁파하여 돌려보낸다면, 사람들의 원망이 없고 나라에는 저축이 있게 될 것입니다.
1. 성상께서는 미음과 술 된장국으로써 길가는 사람에게 베풀어주었습니다. 신이 사사로이 생각하건대, 성상께서는 광종이 죄업(罪業)을 소멸하기 위해 보시하여 인연을 맺으려고 한 뜻을 본받으려고 하시나, 이는 이른바 ‘작은 은혜는 두루 베풀어지지 못한다1)[小惠末遍].’는 것입니다. 만약 그 상벌(賞罰)을 분명히 하여 악한 것을 징계하고 착한 것을 권장한다면, 복을 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작은 일들은 임금의 정치하는 체통이 아니오니, 이를 폐지하시기 바랍니다.
1. 우리 태조께서는 대국을 섬기는 데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수년만에 사신을 한 번 보내어 교빙(交聘)의 예(禮)를 행했을 뿐입니다. 지금은 단지 사신만 보낼 뿐 아니라, 또 무역하는 심부름꾼의 내왕이 번거롭게 많은 까닭에 아마도 중국에서 천하게 여길까 두려우며, 또 왕래함으로 인하여 배가 침몰되어 죽는 자가 많으니, 청컨대 지금부터는 교빙(交聘)하는 사신에게 맡겨 무역을 겸행(兼行)시키고, 그 나머지 무시(無時)로 하는 매매(買賣)는 일체 모두 금지시키소서.
1. 불보(佛寶)2)의 전곡(錢穀)은 여러 사찰의 중들이 각 주(州)•군(郡)에 해마다 놓는[逐年] 장리(長利)를 담당하게 하여 백성을 괴롭히니, 청컨대 모두 이를 금지시키소서.
1. 왕자(王者)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집집마다 찾아가서 날마다 만나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으로 수령(守令)을 나누어 보내어 백성의 이익이 되고 해가 되는 일을 직접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조(聖祖, 태조)께서 통합(統合)한 이후로 외관(外官)을 두려고 하였으나, 대개 초창기에 일이 많았으므로 (미처 이 일을 챙길) 겨를이 없었습니다. 지금 가만히 보건대, 향리(鄕里)의 토호(土豪)들이 늘 공무(公務)를 핑계대고 백성들에 대하여 횡포를 자행하여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으니, 청컨대 외관을 두어서 백성들을 어루만져 돌보는 일을 맡기소서.
1. 성상께서 사자(使者)를 보내어 굴산(屈山)의 중 여철(如哲)을 맞아 궐내(闕內)로 들어오게 하였으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여철이 과연 능히 남을 복되게 하는 자라면 그가 살고 있는 물이나 흙이 또한 성상의 소유이며, 아침 저녁으로 마시고 먹고 하는 것도 역시 성상께서 주신 것이니 반드시 보답할 마음을 가지고 늘 축원하기를 일삼아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번거롭게 맞아드린 뒤에야 감히 복을 베푼단 말입니까? 지난번에 선회(善會)란 자가 있어 요역(徭役)을 피하려고 출가(出家)하여 산에 있었는데, 광종께서 그를 공경하고 예를 극진히 하였으나 마침내 길가에서 갑자기 죽었으니, 자신이 또 화를 당하면서 어느 겨를에 남을 복되게 하겠습니까? 청컨대, 여철(如哲)을 추방하여 산으로 돌려보내어 선회의 (경우와 같은) 비난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1. 신라시대에는 공경(公卿)•백관(百官)•서인(庶人)의 의복•신발•버선이 각기 품색(品色)이 있어, 공경•백관이 조회할 때면 공란(公欄, 공복(公服))을 입고 가죽 신을 신고 홀(笏)을 잡았으나 조정에서 물러나면 편리한대로 옷을 입었으며, 서인(庶人)이나 백성은 문채(文彩) 있는 옷을 입지 못했으니, 귀천(貴賤)과 존비(尊卑)를 구별하였던 까닭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공란은 비록 토산(土產)은 아니나 백관이 자족(自足)하게 썼던 것입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태조 이래로 귀천을 막론하고 마음대로 옷을 입었으니, 관직이 아무리 높으나 집이 가난하면 공란을 갖추지 못하고, 관직이 없더라도 집이 부유하면 능라(綾羅)와 금수(錦繡)를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문채 있는 물건[옷감]은 모두 토산(土產)이 아닌데도 사람마다 이를 입게 된다면, 아마도 다른 나라 사신을 영접할 때 백관의 예복(禮服)이 법대로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바라건대, 백관으로 하여금 조회할 때엔 중국과 신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공란을 입고 가죽신을 신고 홀을 가지게 하며, 조정에 일을 아뢸 때는 버선과 신을 신되 사혜(絲鞋, 명주실로 만든 신)•혁리(革履, 가죽 신)로 하게 하며, 서인(庶人)은 문채 있는 깁이나 주름진 비단으로 된 옷은 입지 못하게 하고 다만 명주로 된 옷을 착용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1. 신이 듣건대, 중들이 군현(郡縣)에 왕래할 때 관(館)이나 역(驛)에 유숙하여 아전과 백성들을 채찍으로 때리면서 영접과 공궤(供饋)가 늦는 것을 꾸짖는데, 아전과 백성들은 중들이 왕명(王命)을 띠고 하는 것인가 의심하여 감히 두려워서 말하지 못하니, 폐단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중들이 관이나 역에서 유숙하는 것을 금하소서.
1. 중국의 제도는 따르지 않을 수 없으나, 각 지방의 풍속이나 습관은 각기 그 지방의 고유한 습성에 따르게 되니, 다 변화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악(禮樂)•시서(詩書)의 가르침과 군신(君臣)•부자(父子)의 도리는 마땅히 중국을 본받아 비루(卑陋)함을 개혁해야 되겠지마는 그 나머지 거마(車馬)•의복(衣服)제도는 그 지방 풍속에 따라 하고 사치하고 검소함이 중도를 얻으면 되는 것이지 구태여 (남의 것에) 영합할 필요는 없습니다.
1. 여러 섬에 사는 백성들은 그들 선대(先代)에 지은 죄 때문에 바다 가운데서 생장하여 생계가 매우 어려운 실정인데, 또 광록시(光祿寺)에서 조세(租稅)를 때도 없이 징수하니, 날로 곤궁하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주(州)•군(郡)의 예에 따라 그들의 공물(貢物)과 부역을 공평하게 하소서.
1. 우리나라에서는 봄에는 연등(燃燈)을 설치하고 겨울에는 팔관(八關)을 여는데, 사람을 널리 징발하여 노역(勞役)이 매우 번다하니, 원컨대 이 행사를 축소하여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소서. 또 갖가지 우인(偶人)을 만드는데 공력과 비용이 매우 많이 드나, 한 번 바치고 난 뒤에는 곧바로 부수어 버리니, 역시 정도가 지나침은 말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인은 흉례(凶禮)가 아니면 쓰지 않는 것이니, 서조(西朝)의 사신이 전에 와서 보고는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우인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1.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성인(聖人)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천하가 화평하다.’라고 하였으며,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함이 없이[無爲] 세상을 다스린 이는 순(舜)임금이다. 대체 어찌 하였을까? 자기 몸을 공손히 하여 정히 남면(南面, 임금이 남쪽을 향해 앉음. 왕의 지위를 뜻함)을 바르게 했을 뿐이다.’하였습니다. 성인이 하늘과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그 순일(純一)한 덕과, 사(私)가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상(聖上)께서 마음을 겸손하게 가지고 항상 경외(敬畏)하여 신하를 예우한다면, 그 누가 마음과 힘을 다하여 나와서는 좋은 계책을 고하고 물러나서는 임금을 올바로 도울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임금이 예로써 신하를 부리면 신하는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긴다.’라는 것입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날로 삼가하기를 하루 같이 해서, 스스로 교만하지 말고 아랫사람을 접할 때에 공손하기를 생각하여, 혹시 죄가 있는 경우라도 가볍고 중한 것을 모두 법과 같이 논한다면, 태평의 업적을 곧바로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태조께서는 궁내(宮內)에 소속된 노비가 궁중에서 공역(供役)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교외(郊外)에 나가 살면서 밭을 갈아 세(稅)를 바치게 하고, 내구(內廐)의 말은 당장 타는 것을 제외하고는 외구(外廐)에 나누어 보내 기르도록 하여, 국가의 용도를 절약하였습니다. 광종(光宗) 때에 이르러서는, 불사(佛事)를 많이 하느라고 사역이 날로 번다(繁多)하였으며, 이에 교외에 있는 노비를 불러들여 사역에 충당함으로써 내궁(內宮)의 몫으로는 이를 지급(支級)하기에 부족하여 창고의 쌀까지 아울러 소비하였으며, 지금 내구에서 수많은 말을 기르느라고 소비하는 비용이 매우 많아 백성들이 그 해를 받고 있으니, 만약 변방에 환란이라도 있게 되면 군량이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일체 태조 때의 제도에 따라 궁중 노비와 내구마(內廐馬)의 수효를 참작하여 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밖으로 나누어 보내소서.
1. 세속(世俗)에서 선근(善根)을 심는다는 명목으로 각기 소원하는 바에 따라 절을 짓기 때문에 그 수효가 매우 많습니다. 또 서울과 지방의 중들이 시새워 절을 짓느라고 널리 주(州)•군(郡)에 권유하므로, 수령(守令)이 백성들을 징발하여 사역을 시킴을 공역(公役)보다 다급하게 서둘러서 백성들이 몹시 괴로워하고 있으니, 원컨대 엄격히 금단(禁斷)하소서.
1.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천자(天子)는 당(堂)의 높이가 9척이고, 제후(諸侯)는 당의 높이가 7척이다.’ 하였으니, 각자 정한 제도가 있는 것입니다. 근래에는 사람들이 지위에 높고 낮음이 없이 단지 재력(財力)만 있으면 모두 집짓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주(州)•군(郡)•현(縣)과 정(亭)•역(驛)•진(津)•도(渡)의 세력가들이 시새워 큰 집을 지어 법제를 어겼으니, 다만 한 집안의 재력을 다 드렸을 뿐 아니라 실상은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이므로, 그 폐단이 매우 많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예관(禮官)에게 명해서 지위가 높고 낮은 사람의 가옥(家屋) 제도를 참작해 정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준수(遵守)토록 하되, 이미 그들이 제도를 어겨 집을 지어 놓은 것도 또한 헐어버리게 하여 뒷사람들을 경계하게 하소서.
1. 불경(佛經)을 베끼고 불상(佛像)을 만드는 것은 다만 오래 전하기를 구할 뿐인데, 무엇 때문에 진귀한 보물로 장식하여 도둑질 할 마음을 열어 준단 말입니까? 옛날에 불경은 모두 황지(黃紙)에다가 전단목(旃檀木)으로 축(軸)을 만들었으며, 그 초상(肖像)은 금(金)•은(銀)이나 동(銅)•철(鐵)을 쓰지 않고, 다만 돌이나 흙이나 나무만을 썼으므로, 이를 훔치거나 부수는 자가 없었습니다. 신라 말기의 불경이나 불상은 모두 금•은을 사용하여 사치가 정도에 지나쳤으므로 마침내 (나라가) 멸망하게 되었고, 장사꾼들은 불상을 훔치거나 부수어서 서로 매매(賣買)하여 생업을 영위(營爲)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근대(近代)에 와서도 남은 풍습이 없어지지 않았으니, 원컨대 엄격히 금단(禁斷)하여 그 폐단을 개혁시키소서.
1. 옛날에 진(晉)나라의 덕이 쇠하자, 난(欒)•극(郤)•서(胥)•원(原)•호(狐)•속(續)•경(慶) 등3)의 백작들은 강등되어 종의 신분으로 있었으나, 우리 삼한(三韓)의 공신(功臣) 자제는 매양 특사(特赦)의 성지(聖旨)를 입어 반드시 포상하여 녹용(錄用)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관작을 받는 일이 없어서 천인에게 섞여 있으니, 신진(新進)의 무리가 대부분 방자하여 능멸하고 업신여기므로, 원망과 한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광종(光宗) 말년에는 조정 신하들을 죽이고 내치어, 세가(世家)의 자손들이 가문을 계승할 수 없었습니다. 청컨대 누차 사유(赦宥)하는 은총을 내리신 대로 그들 공신의 등급에 따라 그 자손들을 녹용(錄用)하고, 또 경자년(庚子年, 940년 태조 23년) 전과(田科)와 삼한(三韓)의 후손으로 입사(入仕)한 자도 또한 참작하여 관계(官階)와 관직을 준다면, 억울함이 풀리게 되고 재해(災害)가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1. 불법을 숭상하여 믿는 것이 비록 좋지 못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러나 제왕(帝王)과 사서(士庶)가 공덕으로 삼는 일은 실로 같지가 않습니다. 서민과 같은 경우는 수고하는 것이 자신의 힘이요, 소비하는 것이 자기의 재물이므로, 해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않겠지마는, 제왕의 경우에는 백성의 힘을 괴롭히고 백성의 재물을 소비하게 됩니다. 옛날에 양(梁)나라 무제(武帝)는 천자의 존귀한 신분으로서도 필부(匹夫)의 착한 일을 닦았습니다. 신(臣)이 듣건대, 사람의 화복(禍福)과 귀천(貴賤)은 모두 처음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것이니, 마땅히 순리에 따라 (화복•귀천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하물며 불교를 숭상하는 것은 다만 내생(來生)의 인과(因果)를 심는 것이어서 현재 나타나는 응보(應報)에 이익됨이 적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요점은 아마도 이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또 삼교(三敎)는 각기 업으로 하는 바가 있으니, 그것을 행하는 자가 혼합하여 한 가지로 행할 수는 없습니다. 불교를 행하는 자는 몸을 닦는 것이 근본이요 유교를 행하는 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근원이니, 몸을 닦는 것은 바로 내생(來生)을 위한 밑천이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곧 오늘의 할 일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가깝고 내생은 지극히 먼데, 가까운 것은 버려두고 먼 것을 구하는 것은 또 그릇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임금은 오직 한결 같은 마음으로 사욕이 없이 만물을 널리 구제해야 할 것인데, 어찌 원치도 않는 사람들을 사역시키고 창고에 저축된 곡식을 허비하면서까지 기약할 수 없는 이익을 구하단 말입니까? 옛날 당(唐) 나라 덕종(德宗) 비(妃)의 아버지인 왕경선(王景先)과 부마(駙馬) 고염(高恬)이 성수(聖壽)의 연장을 위하여 금동(金銅)으로 불상(佛像)을 주조(鑄造)하여 바치니, 덕종이 말하기를, ‘짐(朕)은 일부러 지어서 하는[有爲] 공덕은 공덕이 없는 것으로 여긴다.’ 하고, 그 불상을 두 사람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이는 그러한 심정이 비록 진실은 아니었더라도,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이익이 없는 일은 하지 못하게 함이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우리 왕조에서는 겨울과 여름에 강론하는 법회(法會) 및 선왕(先王)이나 선후(先后)의 기일재(忌日齊)는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어 취하거나 버릴 수 없겠지만, 기타 감할 수 있는 것은 청컨대 감하소서.
1.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해당되는 귀신이 아닌데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다.’ 하였고, 《좌전(左傳)》에 이르기를, ‘귀신은 그 족류(族類)가 아니면 흠향하지 않는다.’하였고, 또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음사(淫祀)는 복이 없다.’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종묘•사직의 제사는 법대로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많으면서 그 산악(山嶽)의 제사와 성수(星宿)의 초제(醮祭)는 너무 떠들썩하고 법도에 지나칩니다. 제사라 하는 것은 자주 지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 자주 지내면 번거롭고 번거로우면 불경(不敬)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성상께서 마음을 재계하고 공경을 다하여 진실로 게을리 하는 바가 없다고 하더라도, 제향(祭享)을 맡은 관원이 이를 예사로운 일로 보고 싫어하고 게을리 하여 공경하지 않는다면, 귀신이 즐겨 흠향(歆享)하겠습니까? 옛날에 한(漢) 나라 문제(文帝)는 대략 제사에 유사(有司)로 하여금 경건히 지내게만 하고서 빌지는 못하게 하였으니, 그 초연함으로 보아 훌륭한 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신명(神明)으로 하여금 알게 하지 못한다면 어찌 능히 복을 내리겠습니까? 만약 그 신명이 알고 있기를 사사로이 자기를 위해 아양을 떤다고 여긴다면, 군자도 오히려 그를 기쁘게 여기기 어려울 터인데 더구나 신명이겠습니까? 제사의 비용은 모두 백성의 고혈(膏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만약 백성들의 힘들임을 쉬게 하여 그 환심(歡心)을 얻는다면, 그 복은 반드시 빌어서 얻는 복보다 많을 것입니다. 원컨대, 성상께서 별례(別例)의 기제(祈祭)를 폐지하시고, 그 보다는 자신을 공손히 하고 몸소 책망하는 마음을 간직해서 하늘을 감격시킨다면, 재해(災害)는 자연히 제거되고 복록(福祿)이 자연히 찾아올 것입니다.
1. 우리나라 양민(良民)•천민(賤民)의 법은 그 유래가 오래입니다. 우리 태조께서 창업(創業)한 초기에는 여러 신하들이 본래부터 노비(奴婢)를 둔 자를 말고 본래부터 (노비가) 없던 자는, 혹 종군(從軍)하여 포로로 얻기도 하고, 혹은 재물로 종을 사기도 하였습니다. 태조께서 일찍이 포로를 석방하여 양민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공신(功臣)의 뜻을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편의(便宜)에 따르도록 허용하였으므로, 60여 년에 이르도록 항소(抗訴)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광종(光宗) 때에 이르러 비로소 노비를 안험(按驗)하여 그 시비(是非)를 가리게 하니, 공신들은 한탄하며 원망하지 않는 이가 없고, 천한 노예들은 뜻을 얻어 존귀(尊貴)한 사람을 능멸하고 반목하여 앞다투어 본 주인을 허위 (날조)로 끌어넣어 모함하는 자를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광종은 스스로 화(禍)의 원인을 만들어 놓고도 능히 막아 단절시키지 못하였으며, 말년에 이르러서는 억울하게 죽이는 일이 매우 많았습니다. 옛날 후경(侯景)이 양(梁)나라 대성(臺城)을 포위하였을 때, 근신(近臣)인 주이(朱异)의 집 종이 성(城)을 넘어 후경에게 투항하니, 후경이 (그 종에게) 의동(儀同)의 벼슬을 주었습니다. 그 종이 말을 타고 금포(錦袍, 비단 도포) 차림으로 성에 와서 외치기를, ‘주이는 벼슬한지 50년이 되어서야 이제 (겨우) 중령군(中領軍)이 되었지만, 나는 후왕(侯王, 후경(侯景))에게 벼슬을 시작하자 이미 의동이 되었다.’고 하니, 이에 성안의 종들이 앞다투어 나와서 후경에게 항복하여 대성이 결국 함락되었습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앞일을 깊이 거울로 삼아 천한 자가 귀한 이를 능멸하지 못하게 하여, 노비와 주인의 분수에 있어 중도(中道)를 지켜 조처하소서. 대저 벼슬이 높은 이는 이치를 알기 때문에 법도 어긋나는 일을 하는 것이 적으며, 벼슬이 낮은 자라도 진실로 지혜가 족히 (자신의) 비위(非違)를 분식(粉飾)할 만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능히 양민을 천민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오직 궁원(宮院)과 공경(公卿)들이 비록 혹 위세(威勢)로써 잘못을 저지르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정사는 거울과 같이 맑아서 사(私)가 없이 공평한데 어찌 능히 방자하게 멋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주(周)나라)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이 도(道)를 잃었다 한들 선왕(宣王)과 평왕(平王)의 덕을 가릴 수는 없으며,4) 한(漢)나라 여후(呂后)가 덕이 없다 해서 문제(文帝)나 경제(景帝)의 어짊에 누(累)가 되지 않았습니다.5) 오직 현재 판결(判決)에 있어서는 세밀히 밝힘을 요무(要務)로 삼아 후회가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나 전대(前代)에 판결한 것은 (다시) 추적하고 캐어내서 세상을 어지럽게 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 soy 한국사
텍스트 파일로 된 위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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