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대외 관계의 변화* 962 : 송과 통교 ➝ 993 : 강동6주(거란) ➝ 1019 : 귀주 대첩(강감찬, 거란) ➝ 1107 윤관 여진정벌 (별무반) ➝1125 : 이자겸, 금의 사대요구 수용 ➝ 1135 : 묘청 서경천도 ➝ 1232 : 강화도 천도 ➝ 1251 : 팔만대장경 ➝1270 개경 환도 ➝ 1368 : 원의 멸망 (공민왕 개혁) ➝ 1389 : 박위 쓰시마 섬 정벌 ~ 홍건적(정세운, 안우, 이승경, 이방식 이성계), 왜구 (최무선, 이성계, 최영, 정지, 연호군) ➝ 1392 : 고려멸망* 거란 916 → 고려 918 → 정안국(定安國) 927 → 송 960 ➝ 남송멸망 1279Ⅰ. 고려의 외교 정책1. 북진 정책과 친송 정책 – 친송배요, 외왕내제 (外王內帝), * 고려도경 (高麗圖經) : 송과의 교통로 연구에 도움이 되는 책2. 정안국(927)의 등장 : 발해 부흥 운동 Ⅱ. 거란* 태조 : 만부교사건 → 정종 : 광군사 → 성종 1차 침입 (서희, 강동6주) → 현종 : 양규, 강감찬 → 고종 : 조충, 강동의 역1. 거란의 침입 배경 : 친송책, 북진 정책2. 거란의 침입(1) 제1차 침입 (성종, 993)1) 소손녕 침입 2) 서희가 거란과 협상 - 강동6주 확보 (압록강까지 확장)“소손녕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소.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그대 나라가 침식하였고 우리와 국경을 맞닿았는데도 바다를 넘어 송(宋)을 섬기고 있소. 그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니 만일 땅을 바치고 국교를 맺으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오.” 서희 “아니오.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땅이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만일 영토의 경계로 따진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이 모두 우리 영토 안에 있거늘 어찌 침략이라 하리오. 그리고 압록강의 내외도 또한 우리 영토인데, 지금 여진이 가로막고 있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심하오. ~ 만일 여진을 내쫓고 우리 옛 땅을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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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보내어 도로를 통하게 하면 감히 국교를 맺지 않으리오.”” – 고려사절요3) 거란의 연호를 사용 : 형식적 사대관계 체결 (송과 비공식 교류 지속)T) 서희가 담판을 지을 때 시대에 최승로가 시무28조를 올렸다.(2) 제2차 침입 (현종, 1010)1)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강동 6주 요구하며 거란 성종이 침입(강조의 정변 :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왕위를 빼앗으려 하자 강조가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한 사건)2) 개경 함락 : 왕은 나주로 피신 ➝ 양규가 선전, 문신 하공진의 정전 교섭 ➝ 물러남 ( 현종의 친조를 조건 )(3) 제3차 침입 (현종, 1018)1) 친조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소배압이 침입2) 귀주대첩 : 강감찬이 물리침 (1019)cf) 고려 군현의 뼈대가 완성된 시기3. 전란의 영향(1) 고려•송•거란의 세력 균형(2) 국방 강화 1) 개경에 나성 축조 (현종)2) 천리장성 축조 (1029, 덕종~ 정종) : 압록강 ~ 도련포(3) 7대실록 편찬, 초조대장경 조판 [강동6주와 천리장성](cf. 초조대장경은 몽골 때 소실)(4) 보수 세력의 성장 : 북진 정책 보류(5) 강동 6주가 고려의 영토로 인정(6) 불교문화 교류 1) 원효의 ‘대승기신론소’가 요(거란)에 반포 (x – 금)2) ‘용감수경’이 고려에 유포(7) ‘금’의 성장Ⅲ. 여진 1. 여진과의 충돌(1) 초기의 여진족 : 말갈1) 고려가 건국되자 ‘부모의 나라’로 부르며 조공을 바쳤다.2) 동화정책 실시(2) 완옌부의 추장이 통합 (12세기 초)* 숙신 ➝ 읍루 ➝ 물길 ➝ 말갈 ➝ 여진 (금) ➝ 만주족Cf) 남송의 연례제금책 – 고려와 연대해 금을 제압하겠다는 구상2. 윤관의 여진 정벌(1) 별무반 편성 : 숙종은 신기군을 주축으로 신보군, 항마군(승병)을 편성(2) 동북 9성의 축조 (1107, 예종) - 함주, 영주, 웅주, 길주, 복주, 공험진, 통태진, 진양진, 숭녕진, 몽라골령, 궁한령, 화곶령까지 정복(3) 척경입비도 : 두만강 북쪽 선춘령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이란 비를 세워 경계를 삼은 사실을 그린 그림(4) 9성의 환부 (1108) : 여진족에게 돌려줌3. 금(金)의 건국과 사대 외교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1) 금의 건국 (1115) - 우야소의 동생 아구다(아골타), 수도 회령(2) 압력 : 군신관계 요구 ➝ 이자겸이 받아들임 - 북진정책 좌절(3) 친송을 유지하면서도 군사적 개입을 회피하는 중립의 태도 견지cf) 정강의 변 (1127) - 금이 송의 수도를 점령하여 굴복시킴 → 남송 시작4. 후금 침입 - 정봉수 의병1) 고려 시대 묘청 등 서경파는 금국 정벌과 고려왕을 황제로 승격시키고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자는칭제건원론을 내세웠다.→ 실현 X, 화이론적 세계관을 벗어난 자주적 주장2) 조선 시대 조정에서는 청에 대한 치욕을 씻고자 반청의 정치적 입장을 포기하지 않았다.그리하여 북벌론이 제기되었고 북벌론은 효종 때에 가장 활발하였다.→ 실현 X, 화이적을 벗어난 것이라기보다는 명의 은혜를 갚고자 하는 의미[동아시아 10~12세기 외교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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