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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1. 홍건적의 침입(1) 홍건적 (紅巾賊) : 원 말기 백련교도 중심 한족의 농민 반란군 → 왕이 복주(안동)까지 피난(2) 제1차 침입 (공민왕 8년, 1359) : 모거경 침입 ➝ 이승경, 이방실이 격퇴(3) 제2차 침입 (공민왕 10년, 1361) : 개경 함락 ➝ 정세운, 안우, 이방실, 이성계가 격퇴2. 왜구의 침략(1) 14세기 중반부터 본격적, 쓰시마, 규수 지역(2) 무력 토벌 해결과정에서 신흥 무인 세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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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3) 우왕 때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여 한 때 천도론이 대두(4) 왜구의 격퇴1) 최영(우왕 2년) : 부여의 홍산2) 최무선 (우왕 6년) : 진포에서 화포 이용 (최초 화포사용) - 나세, 최무선, 심덕부 등3) 이성계 (우왕 6년) : 남원의 황산 (아지발도 사살)4) 정지 (우왕 9년) : 남해의 관음포5) 박위 (창왕 1년) : 쓰시마섬 정벌3. 첨설직 수여 (1) 지위를 상승시킨 유향 품관이 널리 존재(2) 홍건적•왜구의 침입으로 지방 세력의 인적•물적 협조가필요하였다. “조령을 넘어 동남쪽으로 바닷가까지 수백리를 가면 흥해라는고을이 있다. 땅이 가장 궁벽하고 험하나 어업, 염업이 발달하고 비옥한 토지가 있었다. 옛날에는 주민이 많았는데,왜란을 만난 이후 점점 줄다가 경신년(1380) 여름에맹렬한 공격을 받아 고을은 함락되고 불탔으며 백성들이살해되고 약탈을 당해 거의 없어졌다. 그 중에 겨우 벗어난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마을과 거리는 빈터가 되고가시덤불이 길을 덮으니, 수령으로 온 사람들이 먼 고을에 가서 움츠리고 있고 감히 들어오지 못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 양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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