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1) 의열단 단장, 임시정부 군무부, 조선의용대장, 광복군 제1지 대장2) 밀양출생, 사회주의자, 민족혁명당 (민족 유일당 건설목표), 황푸군관학교 졸업3) 1958 북한에서 숙청Ⅳ. 애국 지사들의 항일 의거1. 의열단 (1919) - 테러(1) 내용1) 길림 - 김원봉2) 5파괴 - 총독부, 경찰서, 왜적 주요기관, 동양 척식주식회사, 매일 신보사3) 7가살 - 매국노,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조선초독 이하 고관, 일본부 수뇌, 반민족 토호 열신4) 조선 혁명 선언 (1923) : 의열단의 행동 지침a. 신채호 : 의열단의 선언문으로 작성b. 내용 - 민중의 직접 혁명 주장, 준비론•외교론•자치론 문화 운동론의 한계를 비판•배격 “실업발전, 교육진흥은 잠꼬대가 될 뿐 ~ 외교론은 ~~ 모두 X ~ 직접 혁명 ~~”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 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손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가 인류를 압박하지 않으며 사회가 사회를 수탈하지 않는 이상적 조선을건설할지니라.”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실천에 옮긴다.”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 제1은 이민족 통치를 파괴하고자 함이다. ~ 제2는 특권 계급을파괴하고자 함이다. ~ 제3은 경제약탈제도를 파괴하고자 함이다. ~ 제4는 사회적 불균형을 파괴하고자함이다. ~ 제5는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하고자 함이다. ~ 이리하여 ‘고유적 조선의’,‘자유적 조선 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이민족 통치의’, ‘약탈제도의’, ‘사회적 불평등의’, ‘노예적 문화사상의’ 현상을 타파함이니라. 그런즉,파괴적 정신이 곧 건설적 주장이라. ~ 우리 이천만 민중은 일치로 폭력파괴의 길로 나아갈 지니라.”“직접 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6) 활동변화a. 초기 - 무정부주의 노선의 영향을 받기도 함.b. 무장투쟁 - 황포군관학교 입학 (1926)c. 북벌공작 참여 (1926)d. 광동 본부, 공산주의 운동e. 조선혁명군사 정치 간부학교 (1935) - 체계적인 혁명간부 양성에 관점f. 중국 관내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운동에 주도적 역할 담당g. 민족 혁명당 결성 (1935)“조선 민족이 일본과 대항하기 위해서는 군사학과 무기 사용법 등을 배워야 하는바, 본교는 실제로 그것을 습득하는 곳이 될 것이다. 중∙한 민족은 절대적으로 제휴하여 중국 동북 3성을 탈환함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 제군은 본교에서 기술을 습득하고, 학습을 연마하여 장래의 발전을 개약하도록 하라.” - 2기생 입교식 축사 – 김원봉(2) 의열단 활동1) 박제혁 - 1920 - 부산 경찰서 투탄2) 최수봉 - 1920 - 밀양 경찰서 투탄3) 김익상 - 1921 - 조선 총독부 투탄4) 김상옥 - 1923 - 종로 경찰서 투탄5) 김지섭 - 1924 - 일본 동경 궁성 투탄6) 나석주 - 1926 - 동양 척식 주식회사 투탄의거cf) 비밀리 폭탄 제조소 설치 (상하이)3. 한인 애국단 (1926, 1931) - 테러(1) 조직 : 상하이 – 김구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이 추진을 의결하여 성립) “이렇게 하여 정부는 자리가 잡혔으나, 경제 곤란으로 정부의 이름을 유지할 길도 막연 하였다. ~정부의 집세가 30원, 심부름꾼 월급이 20원 미만이었으나, 이것도 지불할 여력이 없어서 집주인에게 여러 번 송사를 겪었다. ~ 나는 임시정부 정청에서 자고, 밥은 돈벌이 직업을 가진 동포의 집으로 이집 저집돌아다니면서 얻어먹었다.” ➝ 임시정부 당시 상황 - 그에 대한 극복 노력으로서의 애국단 조직 <백범일지>(2) 활동1) 조명하 - 1928 - 타이중 의거 (구니노미야)2) 이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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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 1932 - 일 국왕 (히로히토) 암살 미수 - 상하이 사변 일어남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 – 이봉창의 선서문3) 윤봉길 - 1932 - 만주사변 전승식을 여는 상하이 훙커우 공원 투탄 의거 (한중연합 계기) “만보산사건 후 우리를 냉대하던 중국인 이웃들은 금방 우리 모두가 의거에 관련되거나 한 것 같이인사를 하고 고마워했다. 어쨌든 참으로 통쾌한 일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상해를 탈출해야 된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 조계 당국에서는 여러 해 동안 상해에 있는 우리 독립 운동가들을 정치적인피난민으로 취급하여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이 사건 때문에 사정이 달라졌다. 당시 상해는 일본군점령 하에 있었으므로 프랑스 당국은 일본의 압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장강일기>“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마라. ~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 윤봉길 편지 –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이봉창 의사] [이봉창 선언문] [윤봉길 의사]4. 대한노인단 - 1919 - 강우규 - 사이토 총독 투탄5. 다물단 (1923) - 북경, 김창숙☞ “아! 횡포한 일본이 ~ 먼저 중국을 구하고 ~ 목숨을 함께 바치자는 까닭이다.” - 김구 「도태실기」 [구 서울역 앞에 세워진 강우규 의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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