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둔자 전투 → 봉오동 → 훈춘사건 → 청산리 → 간도참변 → 대한독립군단 → 자유시참변→ 3부 성립 → 미쓰야 협정 → 3부 통합운동 → 혁신의회 → 한중연합홍범도 [洪範圖, 1868 ~ 1943.10.25]1) 1968년 평북 자성 출생2) 1907년 삼수갑산 의병 투쟁3) 1910년 간도로 감4)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5) 1921년 자유시참변을 모면하고 이르쿠츠에가 적군에 편입6) 레닌에게 훈장과 권총을 받음7)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8) 1943년 시베리아에서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76세로 사망9)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백야(白冶) 김좌진 [金佐鎭, 1889.11.24(음) ~ 1929.12.25(음)]1889년 충남 홍성 출생1905년 육군무관학교 입학1907년 호명학교, 애국계몽운동1909년 한성신보 간부, 안창호와 서북학회 조직1915년 대한광복회 (비빌 결사 조직)1918년 대종교 입교1918년 무오독립선언서 민족 지도자 39명 중 1인1919년 대한정의단 기반에 군정부 조직 후 북로군정서로 개편1920년 청산리 전투1925년 신민부 창설1927년 삼부 통합 실패1930년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순국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Ⅲ. 독립군의 항일 전쟁과 시련1. 국외의 독립군 부대 활동(1) 만주 - 대한 독립단, 서로 군정서, 북로 군정서, 대한 독립군, 국민회군, 태극단, 대한 통의부(2) 연해주 - 신민단, 경비대, 혈성단(3) 미국 - 국민 군단, 비행사 양성소, 소년병 학교2. 독립 전쟁 (1) 봉오동 전투 (1920. 6)1) ‘삼둔자’에서 패배 후 일본이 봉오동을 기습2) 홍범도 ‘대한 독립군’ + 안무 ‘국민회 독립군’ + 최진동 ‘군무 도독부군’ – 대승(2) 청산리 전투 (1920. 10. 10.)1) 훈춘 사건 조작 (일본)2) 김좌진 ‘북로 군정서’ 등3) 백운평 전투, 완루구 전투, 천수평 전투, 어랑촌 전투, 맹개골 전투, 만기구 전투, 쉬구 전투, 천보산 전투, 고동하 전투“하늘은 미워한다. 배달족의 자유를 억탈하는 왜적들은, 삼천리강산에 열혈이 끓어 분연히 일어나는 우리 독립군” – 군가“백두의 찬 바람은 불어 거칠고 압록강 얼음 위엔 은월이 밝아 고국에서 불어오는 피비린 바람. 갚고야 말 것이다. [청산리 전투]골수에 맺힌 한을~” – 군가“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 단 하루 만에 끝난 전투가 아니었다. 21일 아침 8시에 시작되어 26일 저녁까지 6일간을 꼬박 새우며 싸운 6일 전쟁이었다. 10월 21일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완구루 전투 ~ 한편 일본군은 어랑촌 전투에서도 크게 패하여 기병연대장 가노 대좌를 비롯하여 다수의전사자와 부상자를 냈다. 북로 군정서 사령부 발표에 의하면 적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1천6백 명에 달했으며 중국 관변 측 발펴에 의하여도 전상자를 1천3백 명으로 추산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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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교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되었다. 굶주림! 그러나 이를 의식할 시간도 먹을 시간도 없었다. 마을 아낙네들이 치마폭에 밥을 싸서 가지고 빗발치는 총알 사이로 산에 올라와 한 덩이 두 덩이 동지들의 입에 넣어 주었다. ~ 얼마나 성스러운 사랑이며, 고귀한 선물이랴! 그 사랑 갚으리, 우리의 뜨거운 피로! 보답하리, 이 목숨 다하도록! 우리는 이 산과 저 산으로 모든 것을 잊은 채 뛰고 달렸다.” – 우둥불, 이범석3. 시련(1) 간도참변 (경신참변) - 1920. 10.(2) 자유시 참변 (1921)1) 대한 독립군단 조직 (밀산부) - 홍범도, 서일, 김좌진2) 자유시 참변 - 소련으로 이동, 적색군(소련) vs 백색군 (반혁명군) 중 적색군을 도움3) 이용만 당하고 강제 해산 [간도 참변]“촌락은 차례차례 매일 조직적으로 소각 당하고 청년들은 사살되었다. 장암동에서는 높이 쌓아 올린 곡물에 방화하고 촌민들에게 집 밖으로 나올 것을 명령하였다. 촌민들이 밖으로 나오면 늙은이든 어린이든 눈에 띄는 대로 사살하였다. 총알을 맞고도 죽지 않은 사람은 짚을 덮고 불로 태웠다. 새로 만든 무덤을 세어보니31개였다. 다른 두 마을을 방문하였다. 우리들은 불탄 집 19채와 무덤 또는 시체 36구를 목격하였다. 용정에돌아오니 일본 병사들이 술에 취해 있었다.” <간도참변>“용정촌에서 40리가량 떨어져 있는 한 마을은 왜군이 야간에 습격하여 청년을 모조리 죽였으니 밤마다 죽는 사람이 2, 3명씩 되었다. 이는 1920년 10월의 일이다. 당시 참사를 현지에 있던 미국인 선교사 마틴은 다음과같이 기록하고 있다. “10월 31일, 연기가 자욱하게 낀 찬랍파위 마을에 가 보았다. 사흘 전 새벽에 무장한일개 대대가 이 기독교 마을을 포위하고 남자라면 늙은이, 어린이를 막론하고 끌어내어 때려 죽이고 ~”」<한국민족운동사, 조지훈> ➝ 장안동 참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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