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공민왕의 개혁 정치(1) 14세기 중반 : 원 명 교체기(2) 반원 정칙1) 친원파 숙청 - 기철, 노책, 권겸 주살2) 정동행성이문소 폐지3) 관제 복구 (문종 때로)4) 몽골풍 폐지 “변발과 호복은 선왕의 제도가 아니오니~”5) 쌍성총관부 회복 (1356) - 철령 이북 (함경도 원산지역)cf) 의주, 초산, 강계, 갑주, 길주 지역 회복6) 요동 수복 정책 : 지용수, 이성계 (요양을 점령)(3) 왕권 강화책1) 권문세족을 견제2) 정방 폐지 : 신진사대부의 등장을 활성화 → 왕의 인사권 실시 (인사권을 전리사와 군분사로 이전)3) 교육•과거제도 정비 : 성균관 부흥 (1367)5) 성균관 강화 - 신진사대부 등용 (정치 세력화) - 이색, 정몽주, 정도전4) 전민변정도감 (田民辨整都監) 설치 : 승려 신돈을 등용 ➝ 노비해방, 토지 돌려줌 ➝ 국가 재정 수입 기반 확대 (왕권강화)[공민왕의 영토수복]⌜신돈이 전민변정도감을 두기를 청하였다. 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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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판사(장관)가 되어 전국에 알렸다. “요즈음 기강이 크게무너져서 탐욕스러움이 풍속으로 되었다. 종묘•학교•창고•사사•녹전•군수의 땅은 백성이 대대로 지어온 땅이나 권세가들이 거의 다 뺏었다. 돌려주라고 판결한 것도 그대로 가지며 양민을 노예로 삼고 있다. ~ 이제 그 잘못을 알고 스스로 고치는 자는 묻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한을 지났는데도 고치지 않고 있다가 발각되면 조사하여 엄히 다스릴 것이다.”⌟ - 고려사 열전4. 군제 개편(1) 중앙1) ‘충용위’설치 (忠勇衛)2) 8위제 복설3) 방리군, 한산군(전함관, 참설관 주축) - 신설(2) 지방군1) 진수군 - 5도 중심 / 지휘관 - 도순문사2) 만호부, 익군 - 양계3) 향촌에서 하층민을 괴롭히던 한량관을 군사조직에 편입시켰다.(3) 특수군 1) 연호군 - 왜구2) 수군5. 공민왕의 개혁 실패1) 원의 간섭2) 권문세족의 반발 (김용) : 신동 제거, 공민왕 시해3) 신진 사대부 세력의 미약 → 근본적 실패 이유 (주체 세력 미약)4) 홍건적, 왜구의 침입“원의 연호인 ‘지정’의 사용을 중단하고 교시하기를 “생각건대, 태조께서 창업하시고 여러 성인들이 계승하여 다행이 선대의 업을 지켜왔다. 그러나 요사이 나라의 풍속이 일변하여 오직 권세만 추구하게 되어 기철 등이 군주를 전율케하는 위협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흔들어, 관리의 인사권이 그의 손아귀에 있고 ~ 토지와 노비를 함부로 탈취하니, 이는 과인의 부덕 탓인가.”라고 하였다.” – 고려사cf) '자제위‘ (子弟衛) 설치 - 개혁에 실패한 후 미소년을 가까이 함cf) 흥왕사의 변 – 개혁 반대 → 공민왕 시해하려 흥왕사 침임 → 외척 권신에 의해 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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