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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SOY ♣/하루의 흔적 Life

회상 2004년 4월 어느 날 (눈 내리던 4월)

by 소이나는 2014.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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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4월 어느 날 



눈 내리던 4월 연길에서


10년 전 4월 나는 눈이 내리던 곳에 있었다.

겨울에 처음 연길에 도착하여 도시 전체가 마을 전부가 눈으로 덮혀 있었는데, 

4월에도 눈이 내리고, 5월 새벽에도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곤, 이렇게 긴 겨울이 존재하는 곳이 한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다.

처음 연길에 도착하여 택시를 잡아타니, 택시가 마치 스키장 위를 달리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도로 전체가 눈이였고 따로 도로를 제설 작업을 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빙판길이 아닌 눈길이라 그런지 차들도 미끄러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눈길을 달린다.

그렇게 북쪽으로 많이 온것도 아닌데 이렇게 눈이 많으면, 도대체 시베리아 쪽은 눈이 얼마나 많이 내리련지... 



지금 생각해보면, 꽃이 피고 기껏해야 꽃샘추위 정도만이 있는 한국의 4월에 비해 저곳이 정말 추운 곳이라는게 실감난다.

나는 추위를 상당히 잘 타는 편인데, 


영하 20도는 가뿐하게 내려가 주는 기온에서 따뜻한 물을 한 바가지 퍼놓고, 

찬물로 샤워를 하며 차가워서 손을 따뜻한 물에 담근 후 그 손을 몸에 비비고, 다시 찬물로 샤워하고...

이게 진짜 내가 경험한 것이라는게 놀랍다.


그런데 그나마 위안인 것은 영하 20도 아래로 내려가지만, 바다가 근처에 없어서 습도가 더 낮아서인지,

한국의 겨울보다 그렇게 춥게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단지 땅이 닿는 발이 유독 시려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도 어쩌면 너무 추워서 춥지 않다고 인식되어버리는 모순적인 상황일지도 모른다.



이 사진을 찍은 날도 그렇다.

지금 보니 입은 옷이 상당히 얇다.

저 흙색의 자켓이 그저 티셔츠 정도의 두께이다.

그런데 주변은 완전 설국인데, 분명히 저 날은 전혀 춥다고 느끼지 않았다는 기억이 생생히 있다.

2월 부터 강추위에 적응이 되어서 이 정도 추위는 정말 쉽게 느껴진 것일 지도 모른다.



이렇게 눈이 내린 배경이 4월 중순 어느 때이라니...

계절의 혼란에 빠지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였다.


5월 초에도 눈이 내린 기억이 난다.


그런데 2004년에는 한국에도 때늦은 눈이 내려 곤욕이었다.

3월 말인가에 폭설이 내려 고속도로의 차들이 오도가도 못해, 헬기로 구호 용품을 보낸다는 소식을 인터넷을 통해 들었다.

그러고 보니 2004년 초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한국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을 받았다는 소식도 들렸고, 이때에 중국에는 한참 사스가 유행하여 공포인 시기였다.

그런데 사스는 조선족 자치주와 한반도에서는 나오지 않아, 중국에서 한국의 김치가 사스에 좋다고 잠시 인기가 좋아지기도 했다.

여러모로 2004년 초기에는 특이한 사건들이 많았다.



그건 그렇고 몇달째 보고있는 눈인데도, 또 눈이 내리니 좋다고 나가서 한국에서온 지인들과 사진을 찍었다.

10년 전에 타지에서 알게되어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형님들의 옛 모습을 보니 기분이 새롭다.

연길에서는 동갑이 없어서 형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는 자연스럽게 내 나이가 형들과 같은 줄 알게되어 동갑인 외국인 친구는 날 형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러시아에서 온 세르게이는 나와 동갑이였다.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지만, 얼굴과 이름을 알고 지낸지 6개월이 다되어가는데, 어느 날 내게 오더니, 한국말로 이렇게 말한다.


"효옹, 10위엔만 빌려주세요~~~!" 


헐~! 

한국어 잘하네... ㅋㅋ 

속으로는 '세르게이 님아~! 님이 나보다 월도 7달이나 빠르다곳~!' 이랬지만,

인자한 표정으로...

"세르게이, 여기 10위엔...." 하며 돈을 건냈다.

뭐 러시아 사람에게 '내가 너의 형이 아니다.'라고 설명하기도 좀 그렇고...

그냥 계속 형으로 알고 있으렴... 하며 지나쳤다. ㅋㅋ

그 뒤로도 간간히 세르게이가 "횽~ 횽~" 하며 불르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런데 지금 세르게이는 더 추운 러시아에서 살고 있겠구나...



그리고 4월에 눈이 내려 기분 좋다고~! 
시내로 나갔다.
버스비는 1위엔. 당시에는 145원... 지금은 1위엔이 175원 정도를 하고 있으니...환율이 많이 오르긴 했다.


위에는 버스를 타고 시내에 가던 모습의 사진 2장인데...

같은 옷을 입고 있지만, 왼쪽에 비해 오른 쪽은 살도 많이 빠지고 머리도 엄청 길어져있다.

머리카락은 왠지 당시에 미용실가는 것이 낯설어 8개월동안 자르지 않아서 나중에는 너무 길어 묶고 다니기도 했다.

왼쪽의 사진이 4월이고 오른 쪽이 아마도 5월 말쯤이였을 것이다.


중국에서 생활하며 재미있는 현상이 있었는데...

한국에서 온 여자들은 전부 살이 찌고, 한국에서 온 남자들은 전부 살이 빠지는 희귀한 현상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여성의 사회적 지휘도 쎄고, 역사적으로도 여자들의 활약이 많아

뭔가 중국 대륙은 남성보다는 여성의 기운이 잘 맞는 것 같다는 얼토당토 않는 혼자만의 이론을 정립해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버스 안에도 여자만 잔득 있네 ㄷㄷ 


시대광장이 보이던 '칼마'에서


버스를 타고 당시 연길의 중심이었던 시대광장으로 향했다.

시대광장에는 칼마라는 대형마트가 있어, 생필품을 그곳에서 많이 샀는데,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사진 뒤로 보면 간판에 한국말도 많이 쓰여 있다.

조선족자치주이기에 간판에 저렇게 한글과 중국어를 같이 병기해 놓고 있다.


처음에 중국어를 단 한마디도 할줄 모르는 상태에서 인천공항에서 중국 남방항공 비행기를 타고,  중국 길림성 장춘에 도착하니...

그때부터 한국어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멘붕이였다.

장춘 공항에는 국제선 건물과 국내선 건물이 따로 있어서, 장춘에서 연길로 가는 비행기로 환승을 해야하는데,

할 줄도 모르고, 말도 안통하고, 그래서 그냥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동하는 곳으로 따라가서 간신히 환승을 하고,

연길에 도착했는데, 저 간판에 쓰인 한글들을 보고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왜 한글은 저리 많이 있는데, 길을 걷는 사람들 중에 한국어? 조선어? 를 쓰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 이상하기도 했다.

시내에서는 거의 대부분 한어를 쓰고 있었다. 

아무리 한글이 많아도 중국이니 뭐.. 그렇겠지.. 하고 말긴 했다.


한국에서도 자주보이는 양꼬치 (촬, 꽴)


시내에서는 자주 먹은 것이 냉면, 훠궈, 촬, 소고기 요리, 양고기 요리 였던 것 같다.

그중에서 가장 자주가던 식당이 순발식당, 연옥식당, 백옥꽴성, 투루판뀀집, 한성, 샤오펑, 동방불고기, 연길냉면부...

그런 식당들이 기억이 난다. 

그 중에서도 순발식당은 정말 자주 다녔던 식당이다.

당시에 한국돈 700원 정도이면 티애판니우로, 황과니우로, 꿔바로, 훼꿔로, 쌍라러쓰, 위쌍러쓰, 위샹치애즈, 라피 같은 그럴싸한 중국요리가 나오던 곳이다.



위에 요리 중에 꿔바로는 요즘 한국에서 중국식 탕수육이라며 팔고 있는 것을 말하고,

티애판니우로는 철판소고기볶음 정도이고, 훼꿔로는 삼겹살을 야채와 함께 매콤하게 볶은 것이고, 위샹치애즈는 가치 볶음 같은 것이고,

라피는 말로 설명하기 좀 그렇고, 쌍라러쓰도 설명하기가 좀 애매하다.

아래 사진으로 왼쪽이 라피인데, 사진을 보니, 건두푸, 오이, 고수에 저 몰랑한게 뭐더라, 전에 알았는데 안먹어 본지 오래되서 그런지 까먹었다.

그리고 아래 사진의 오른쪽이 쌍라러쓰인데, 한국사람들이 잘 못먹는 향차이(향채, 고수)가 엄청 들어가 있는 고기 볶음이다.

대부분이 알고 있겠지만 향차이를 잘 못먹으면 중국요리를 많이 놓치게 되는 것도 갔다.



나 같은 경우는 향차이를 처음에는 좀 역해서 못 먹었는데,

모임에서 게임을 하다가 향차이를 듬뿍 넣은 쌈을 만들어 먹는 것이 벌칙으로 자주 있어서, 그렇게 먹다보니 익숙해져 금방 잘 먹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식사를 할때에는 늘 술을 마셨던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이 술을 잘 마시긴 하는데, 정말 중국사람들 술 마시는 것은 대단하다.

다른 것보다도 식사를 하면 자연스럽게 물 대신 술을 마시게 된다.

음식 자체도 약간 짜고, 기름기도 좀 있어서, 대부분의 요리가 마치 술 안주 같다.

만약 4명이 식사를 하면,

탕수육 한 접시, 깐쇼 새우 한 접시, 깐풍기 한 접시, 고추잡채 한 접시 이렇게 놓고 밥 없이 그냥 그것만 먹는다고 생각하면된다.

매번 그렇게 먹으면, 술을 마실 수밖에 없게 된다.

한국에서 술을 한 달에 1번 정도 마시고, 거의 마시지 않았는데, 중국에서는 하루에 3~4번은 술을 마신 것 같다.

사람들과 밥을 먹으면 장난이 아니라 정말 술을 짝으로 사서 식당으로 가지고 들어가기도 한다.

맥주는 애교라고 하고, 60도가 다되는 위미주를 자주 마시기도 했다.

술 마시기를 좋아하지 않아 꽤나 힘들기도 했는데, 이렇게 자주 마시니 점점 술에 면역이 생겨 더 많이 마시게 되는 슬픈 현상도 생기기도 했다.


그런데 술을 싫어하는 내가 술을 가장 맛있게 마신 기억이 드는 것도 이 시절이다.

하루는 친한 형님이 북경에 다녀오며, 진공 포장된 북경오리를 사와서 선물로 주어, 방에서 함께 생활하던 외국인들과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어린 녀석이 몰래 숙사를 빠져나가 왠 포대에 '빙천 맥주'를 잔득 사왔다.

빙천 맥주는 연변에서 자주 마시던 맥주 상표인데 아직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포대에서 맥주병을 꺼내니 차디찬 느낌이다. 

술을 사온 녀석에게 물어보니 그냥 가게 밖에 쌓여 있는 걸 사왔다고 한다.

기온이 낮아 밖에 둔 것이 냉장고에 둔 것보다 더 시원했다고 한다. 

정말 병은 살짝 얼어있고, 맥주의 냉기는 최고점을 달하고 있었다.

학교 전체가 밤 10시가 되면 소등을 해버리기에 이미 불은 꺼져, 촛불을 하나 켜놓고, 북경오리 한 마리와 꿔버로 (탕수육) 한 접시를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웃고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한 조선족 녀석이 물어본 말도 기억이 난다.


"한국에서 연예인 누구 봤슴까?"


난... 솔찍히 연애인을 본 적이 거의 없다.

공연장이나 무대에서 본 연애인은 좀 많지만, 그냥 길에서 보던가 가까이에서 본 연애인은 손가락에 뽑힐 정도이다.

그래서  "나 연예인 못봤는뎅~!"  했더니,


"아~ 형님에이~ 한국에 있으며, 연예인 한번도 못보고 뭐했슴까? " 하며 '이 형 안되겠네~~' 하는 표정이었다. ㅋㅋ


술도 약하며 엄청 마셔 쓰러진 ㅋ 카페에서 친구 기다리다가...커피믹스 사가지고 들어오던 길에...


그리고 커피는... 

이때에는 중국 사람들이 커피를 많이 마시지 않고 있었다.

연길에는 카페 라는 것 자체가 없었고, 학교 내에 자신이 셀프로 타마시는 커피를 파는 카페가 하나 있었다.

그 뒤로 여행을 다니며 큰 도시인인 북경, 상해, 항주, 천진 등에서는 카페를 보기는 했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연길에서는 커피 믹스를 마시려 마트에 갔더니, 믹스 커피는 전부 한국제품만 있었다. 

그때 커피 믹스의 가격은 한국에서보다 비쌌다. 이런...

수입품이라 그런 거려나?.. 그래도 커피는 마셔야니.. 안 살 수도 없고, 맥주 한 병이 한국 돈으로 150원인 때에,

가장 싼 맥스웰 커피믹스 한 통은 1800원 정도 였다.

왠지 가격이 그렇게 형성 되어 있으니, 커피 믹스가 사치품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청년공원에서조선족자치주 정부 근처에서동방 나이트에서


요즘 한국은 너무 따뜻해서 반팔을 입고 다니기에도 충분한데, 저곳에서는 확실히 춥기는 했는가 보다,

4월 중순인데도 두툼한 점퍼로 무장을 하였다.

기억에는 저 사진을 찍는 날에도 칼바람이 불어 추위에 떨어야 했다.

어쩌면 10년 사이에 지구 온난화 덕분에 지금은 더 따뜻해 진 것도 같다.



4월은 내가 중국에 간지 2달 정도가 지났을 때이다.

처음에 낯선 환경에 정신을 못차렸지만, 점점 적응하고, 여러 나라의 친구들도 사귀고, 함께 여행도가고, 술도 마시고,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여러 봉사활동과 사회적 활동도 많았고, 정신적으로 많은 발전을 하던 시기이다.

중국의 연길은 한국의 4월과는 사믓 다르지만, 한글 간판이 있고, 간간히 한국어를 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나보다 더 한국에 대해 알 아는 사람도 많이 살고 있던 조선족을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많은 것이 변했을 것이다.

내가 살던 때에도 도심의 여러 곳에 건설현장이 보이고, 연길은 계속 발전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니... 

연길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얼마나 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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