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억의 한 편에 고이 있게 될 길림시를 생각하며 >>
<첫날(금요일) – 여행의 시작>
중국에 교환학새으로 온 후에 첫 연휴를 맞이 하게 되었다. 물론 첫 연휴를 맞이 하며 많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실천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였다. 그 계획이란 당연히 여행을 가는 것이였다. 많은 교환학생들이 여행을 갔을 것이다. 여행은 언제나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단지 가까운 산에 오르면서도 우리는 자연의 푸름과, 공기의 고마움,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신을 낮을 수 있는 겸손함을 배울 수도 있다. 하물며, 외지 땅에 나와 있는
나에게 여행이란, 언제나 새롭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최고의 선생님이며, 나를 가르쳐 주는 친구인 것이다. 여행을 함에 흥분되고, 설레이는 마음은 피로와 고단함을 이기기에 충분한 젊음과 포부가 있기에 더욱 알찬 것이 아닌가 한다.
이번 노동절 연휴에는 원래 같이온 교환학생 형의 호상방조인 미연의 집이 있는 통화쪽에 가려했다. 처음 여행을 가기에, 되도록이면 기차를 타고 싶었고, 조금은 멀리도 가보고 싶었다. 그것은 방학기간에 갈 여행을 미리 경험하는 작은 모티브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 이제 중국어를 배운지 2달이 되어, 기차역을 찾아가 힘들게 30일 저녁 기차표를 찾았지만, 역무원은 “没有 没有”를 외칠 뿐이였다. 이렇게 해서 통화쪽으로의 계획을 취소하게 되었다. 이런 사태를 미리 우려했기에, 이차`삼차의 계획을 세워 놓았었다. 통화의 다음 계획은 한국사의 교수님을 따라 단동 등을 가는 것이고, 그 다음 계획은 백두산 여행을 따라가는 것이였다. 하지만, 그런 계획들을 무색하게 만든 것은 현재 한어반 수업을 가르치시는 염준老帅였다. 염준의 집이 길림이였는데, 그 날밤 길림에 가는 표를 구하고 있는 중에, 길림에 함께 가도 되냐는 부탁과 함께, 표의 예매도 함께 부탁하게 되었는데, 기차표를 구하게 되어, 오일절의 여행은 경치가 아름다운 길림시로 가게되었다.
이렇게 하여 푸르고 아름다웠던 길림시의 여행이 시작하게 되었다. 기차의 출발시간이 금요일 밤 10시 30분이었기에 그날 저녁 7시에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 같은 학교의 정순과 기준 그리고 고신대의 소정과 염준을 학교에서 만나고, 기차 여행을 하며 심심한 입을 풀어줄 과자와 음료를 사러 시내의 칼마에 갔다. 칼마에서, 과자와 음료 그리고 ‘장백산’이라는 싼 포도주를 샀는데, 포도주는 알콜 5%로 거의 음료였다. 기차안에서 농도가 짙은 알콜은 미안해서였는지, 알콜이 적은 포도주로 여행의 시작을 축복하고자 한 마음이 우리를 끌었는가 보다. 그후에 함께 한성관이라는 한식집에서 계란말이, 제육볶음, 설렁탕, 김치찌개, 칼국수를 먹고, 기차역에 가게되었다. 기차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노동절의 기간을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부적였다. 역시 역은 만남의 장소이고, 헤어짐의 장소이고, 새로운 출발의 장소인가 보다. 역에서는 장춘으로 떠나는 룸메이트와 여행을 떠나는 다른 부류의 교환학생을 볼 수 있었다. 아마 한동대 학생이였을 것이다. 기차는 잉워를 타고 갔는데, 여섯명이 한 칸에 3층으로 된 침대칸 이였다. 1층이 제일 높고, 3층이 제일 낮은 자리였는데, 2층과 3층이 우리의 칸이였다. 역시 처음 접하는 침대칸의 기차였고, 처음 접하는 중국의 기차였기에, 마음은 새롭고 신기하며, 낯설었다. 5명이 여행의 맴버였기에, 기차가 출발하며 기차의 낭만을 즐기려 모였지만 역무원은 자리가 무겁다며 한 층의 침대에 2명 이상 올라가면 안된다 하고, 출발과 동시에 불을 꺼 그 낭만은 어둠속으로 사그라 들었다. 하지만, 그것에 물러설 우리들이 아니였다. 작은 손전등을 키고, 몰래 앉아서 음료같은 포도주를 마시며,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다음의 문제는 1층침대에 있는 다른 승객이 시끄럽다하여, 기차안에서의 담소는 끝나게 되었다.
<둘째날(토요일) – 길림시에의 도착>
새벽이 되어 정순이가 깨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 짐을 쳉겨 기차에서 내리게 된 시간이 4시 50분이였다. 졸린 눈을 비비며 역 밖으로 나가니 처음은 연길과 비슷했다. 역시 중국식의 거리, 손님을 잡으려는 수많은 택시 기사들, 아직까지는 길림이란 도시의 분위기를 잘 몰랐고, 기차를 탄 기억만이 머리속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역앞에 새로 생긴 롱시양여관에 짐을 풀게 되었는데, 한 명이 하루에 25원 가격으로 가격에 비해 정말 좋은 시설이였다. 그곳은 3층에 남자 목욕탕, 2층에 여자 목욕탕이 있고, 무료로 씻을 수도 있으며, 2인 1실을 썼는데, 방에 TV있고, 침대 2개있고, 화장실이 있었다. 처음 기차를 타는 것이기에 몸은 피곤했고, 잠의 부름속에 오전은 그렇게 쓰러저 잠 속을 헤메게 되었다.
역앞 철도청의 모습
그리고 점심식사시간, 연길을 떠나 외지에서 먹게된 것은, 신선로였다. 아주 큰 집으로 역에서 45, 46번 버스가 가며, 택시를 타면, 5원에서 7원사이에 갈 수 있는 곳이였다. 식당은 음식도 맛있었지만, 인테리어가 멋있었다. 중국식의 3층이 모두 식당인데, 멋있기에 사진을 화장실 앞에서 까지 찍게 되었다. 비록 화장실 앞이지만, 그 배경은 최고였다.
그 후에 강남공원(세계공원)에 가니, 쉬는 날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한국의 도시에 비해 중국의 도시에는 공원이 많이 있는 것 같다. 도시의 탁한 이미지와 삶의 활력을 찾을 수 있는 공원이 많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가족들이 쉽게 나들이를 나올 수 있는 환경이 있다는 것 또한 빌딩과 개인의 집으로 가득찬 한국의 도시가 배워야 할 점이 아닌가 한다. 단지 공원하나이지만, 그 속에서 커가는 아이들이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그 공원에는 모택동 상이 앞에 있는 박물관이 하나 있는 데, 노동절 기간 중, 병마용의 유물들을 전시해 놓아서, 멀리 서안의 중국유물을 볼 수 있는 기회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운석이 있는 박물관이였는데, 늦은 시간에 갔기에 운석은 보지 못한 것이였다. 박물관을 보고 나오니 해가 지게 되었다. 시간이란 역시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시장의 거리
강남공원
태양의 침몰과 함께 꾸오마오라는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왕 비싼 옥으로 만든 배
백화점 내부
모택동동상
그 옆에 있는 시장을 구경했다. 역시 백화점은 부의 상징이였고, 시장은 사람들의 생활과 모습을 볼 수있는 곳이 아닌가 한다. 옛 날에 어느 여행객이 인도에 가서, 인도의 유명한 장소를 찾아 다니는 중, 그 여관의 주인이 당신은 여행의 참 뜻을 모른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그 의미는 옛것을 찾고 유명한 것은 찾지만, 사람들의 문화와 삶의 모습은 알지 못하기에, 그 유명한 유물의 진정한 뜻 또한 알지 못한다는 것이였다. 하지만 시장은 살아 숨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 가치있는 장소가 아닌가 한다. 그 곳의 사람들은 활기차고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대형 마트에서 다시 밤에 먹을 과자를 사고 여관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오래 시간을 걸었기 때문인지 금새 잠이 들어 버렸다.
<셋째날(일요일) – 비가오는 길림시와 만남>
셋째날의 아침이 밝았다. 오랜 시간을 걸었기에 피곤해서인지 아침에 일어나기가 부단히도 싫었지만 염준의 노크소리에 다시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에 비가 많이 오고 있었는데 결국 그 날 하루 종일 비가 왔다. 학교에서 늘 눈이 오는 것을 보며 시원하게 내리는 비르 그리곤 했었는데, 하필 여행을 할 때에 비가 오다니,,, 이건 아니였다. 그래도 비오는 거리를 걷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떻게 되었건, 아침에 교회에 가게 되었다.
교회에는 사랑 ‘愛’ 자가 덩그라니 써있는 건물로, 오래되 보였다. 이곳의 교회에는 선교를 하시는 분이 그리 많지 않은 지, 한 목사님이 한 쪽 교회에서 설교를 하시고, 옆 건물과 또 그 옆 건물에서는 소리로만 들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교회에는 있었다. 우리는 늦게가서 거의 끝나는 시간에 도착하고야 말았는데, 그곳에는 나이 많으신 분 들이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종교에 대한 생각보다는 삶에 대해 현실적인 것 같았고, 한번도 복음을 들은 적도 없어, 믿음을 가질 시간도 없었고, 아직 영적인 것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것 같았다. 그곳에 늦게 도착하자 한 아주머니께서 다음에 8시에 오라고, 친절히 알으켜 주셨다. 그 아주머니의 검은 얼굴 속에 미소와 친절은 추운 날씨를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나서 오는 비를 보며 점심을 먹었습니다. 점심은 중국식으로 가제를 이쑤시게로 꽂은 것, 가지요리, 닭고기 통체로 구운 것, 옥수수를 스틱으로 만든 요리 를 먹었는데 연길과는 다른 중국요리로 오히려 입맛도 맞고 좋았다. 하지만 같이 온 기준이 형은 약간 느끼하다고 하여 맥주 한병을 시켜서 같이 먹었다.
문제는 밥을 먹고 나와 비가 오
기에 시내구경을 하게 되었다. 시내는 하남거리(he nan jie)에 갔는데, 차들이 못들어오게 했고, 옷가게와 선물가게, 악세사리 가게 등이 길게 늘어 있었다.
수공예 빗을 파는 가계<하남거리>
꽤 괜찮은 곳이였다. 연길과 비교하면, 싸고, 훨씬 현대적이며,, 좋았다. 한국에서도 (충남 천안에 살기에) 천안보다 오히려 시내가 알찼다. 대전의 은행동은 네모난 모양으로 식당과 옷가게가 많다면, 하남거리는 길게 있다. 그리고 명동과 비교하면 당란, 명동이 넓지만, 길게 늘어선 가게는 비슷하기도 했다. 하지만 옷가게가 많은 편이였다. 그래서 쇼핑을 하게 되었는 데, 우선 하남거리 길건너에 있는 광장옆의 백화점에서, 여자친구 사줄, 여성 중국의상 상의를 샀는데, 188원 이였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선물을 할 중국식 반지, 여성 것 5원, 남성것 10원인데,, 할인해서 4원 8원씩 샀다 그러나 중국의상은 노동절 기간이라, 20원 세일 영수증을 받았는 데 , 그돈으로, 반지를 살 수 있었다. 그 후에 하남거리에 갔는 데, 거기에서는 남쪽에서 온 수공예 머리 빗과 거울 등이 있었다. 그 곳에서 빗하나샀는데, 같이 간, 여자들은 손거울을 선물준다고, 몇개 샀다.
몇백년 전통의 빵집^^
그리고 나서 빵가게에 가서 빵을 먹었다. 그 빵가게는 하남거리에 있는데300년인가 됐다고 한다. 인테리어도 중국식인데 2층에는 만주족의 생활이 담긴 옛 길림 거리의 그림이 있었다. 그곳에서 빵과, 중국에서 단오에 먹는 거 먹었는데, 맛이 독특했다. 그렇게 먹은 후에, 역에 갔다. 다른 팀과 합류하기 위해서 였다. 그 쪽 팀은 장춘에서 하루를 있은 후 길림에 왔다. 고신대의 홍석과 명섭이 형, 지현, 영국에서 온 명준(마이클)과 러시아의 데니스, 몽고의 무흐가 합류하여 11명의 여행조가 형성되었다. 그들과 만난후에 만주족식 만두로 유명한 곳에 가서, 밥을 먹고 그 날은 해산하게 되었다.
만주족식 만두가게.. 차를 따르는 사람.
비가 많이 온 날이였지만, 좋은 구경을 많이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재미있었던 일은, 기준이 형이 중국말을 못알아 듣자. 남방사람이냐고 물어보는 것이 이였고, 여관의 종업원과 대화를 하기위해 사전을 찾아가며, 힘들게 대화를 한 것이다. 또 시장에서 만난 한 상인 아저씨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전에 한국 사람과 거래를 한 적이 있었는데 잘해 주웠고, 친절했다고 하니, 알지도 못하는 그 한국분께 감사한 생각이 들게 되었다. 우리 또한 교환학생으로 중국에 와 있지만, 우리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곳의 사람들에게는 한국의 이미지이고 한국의 형상이 될 수 있다는 것에서, 행동가짐에 조심을 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저 교환학생으로 외국에 나온 것이 아닌 외교의 사절이 바로 우리 하나하나가 모두 외교 사절이 아닌가 한다.
<넷째날(월요일) – 길림시의 야경>
처음에는 월요일 밤에 돌아가려 했지만, 사람들의 의견으로 하루 더 있기로 하고, 표를 다음날 것으로 바꾸고, 점심을 먹으로 교외로 나갔다.
폭포와 다리가 있는 정원같은 생태원 식당
약간 먼 외각의 생태원같은 곳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역시 맛있었다. 식당 안이 숲처럼 되어있고, 폭포도 있고, 옆에선 결혼식도 하고 있었다. 역시 중국은 먹을 것이 많아서 좋다. 한국에 있을 때에 이 중국음식을 먹어 보고 싶었던 것이, 이렇게 실현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날은 그래도 어제 보다는 좋았다. 바람이 좀 많긴 했지만, 괜찮은 편이였다.
점심을 먹고, 북산공원(北山公园)에 갔다. 역에서 서남 쪽에 있는 공원이다.
입구
분수대
절
정상
산위에 절이 있는 공원인데 꽤 오래된 곳 인것 같았다. 호수가 있고, 폭포가 있고, 분수가 있고, 동물사는 곳이 있고, 겨울에 스키타는 곳도 있는 것 같았다. 공원 중에서는 길림에서 북산공원이 제일 좋은 것 같다. 그곳에서 오후를 계속있었는데, 한번 쭉 훌터 볼려면, 그정도 걸리기는 할 것 같다. 산 위에 올라가니 시내가 다 보이느데 시원한 마음에 뛰어내리고도 싶었지만, 당연히 뛰어내리지는 못했다. 오래 살아서 더 많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북산공원에는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의 복장을 한 사람들이 어울려 있었고, 산타할아버지 옷을 입고 루돌프 뿔을 한 루돌프산타가 인상적이였다. 그리고 또 먹는시간 저녁을 먹었겠다.
소공자 레스토랑에서,, 무지먹은 저 외국인 들..ㅡㅡ;
저녁은 레스토랑에서 먹었는 데 한국어로 읽으면 "소남자" 라는 간판의 식당에서 피자와 버거, 라이스, 면류를 섞어 먹게 되었다. 많이 먹었는데, 가격도 저렴하고 좋았다. 같이 온, 마이클과 무흐, 데니스는 맛있다며, 많이 먹어 3명이 먹은 요리가 나머지, 9명이 먹은 것보다 많이 나왔다. 정말 잘먹는다.
송화강의 멋진 야경,, 와이탄과는 또다른 감취~~!
저녁을 먹고, 그 식당에서 걸어서 송화강변에 갔다. 야경을 보기 위해 갔는 데, 정말 아름다웠다. 송화강과 멋진 건물의 조명, 강변의 광고판, 다리의 조명, 가로수는 녹색으로 빛을 비추어 더욱 아름다웠다. 송화강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민족이 이 강을 따라 그 멀리 한반도까지 가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옛 인들의 자취를 거슬러 올라온 것에 감사했고, 이런 기회를 맞을 수 있는 것에 고마웠다. 마치 오천년의 세월이 무색한 생각이 들며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한국이 생각났고, 오래전 나를 있게 해준 조상들이 살고 있던 송화강변에 큰 한 숨으로 옛인 들의 호흡을 함께 할 수 있어 커다란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마지막날(화요일) – 용담산, 송화호, 연길>
용담산의 절
여관 방을 7시 전에 빼야 하기에, 일찍일어 났다. 일어나서 아침에 용담산에 갔다. 용담산에는 고구려성이 있다. 용담산이란 이름은 산에 호수가 하나 있는데 그 호수에 용을 가두워서 생긴 이름이다. 그곳에 가면, 비석도 있는 데 "처음에는 부여의 땅이 였는데, 후에 고구려가 땅을 점령하고, 마지막으로 당나라가 차지했다" 이런 식의 글이였다. 그리고 산중턱에, 절이 하나 있고, 그렇게 볼것이 많다고는 할수 없으나, 우리 민족의 흔적을 찾아 방황하는 것, 또한 마음이 뿌듯하고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피를 흘린 부여인과 고구려인, 당나라 사람의 고통은 공원이 되여, 사람들의 웃음과 여유속에 사라져 버린 현실에서, 지금의 시간에 살아 있는 나는 그 생명 자체로 감사함이 들었다. 그리고 점심은 냉면을 먹고, 송화호로 출발을 했다.
놀이 기구가 설치 되어진 용담산..ㅡㅜ
여관 방을 7시 전에 빼야 하기에, 일찍일어 났다. 일어나서 아침에 용담산에 갔다. 용담산에는 고구려성이 있다. 용담산이란 이름은 산에 호수가 하나 있는데 그 호수에 용을 가두워서 생긴 이름이다. 그곳에 가면, 비석도 있는 데 "처음에는 부여의 땅이 였는데, 후에 고구려가 땅을 점령하고, 마지막으로 당나라가 차지했다" 이런 식의 글이였다. 그리고 산중턱에, 절이 하나 있고, 그렇게 볼것이 많다고는 할수 없으나, 우리 민족의 흔적을 찾아 방황하는 것, 또한 마음이 뿌듯하고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피를 흘린 부여인과 고구려인, 당나라 사람의 고통은 공원이 되여, 사람들의 웃음과 여유속에 사라져 버린 현실에서, 지금의 시간에 살아 있는 나는 그 생명 자체로 감사함이 들었다. 그리고 점심은 냉면을 먹고, 송화호로 출발을 했다.
몽고청년 무흐와 지현이
송화호
송화호는 좀 먼데 버스를 타고 갔고 송화호에서 배를 타고, 1시간동안 가 섬에 들어가서 40분 정도를 있은 후에 다시 1시간 타고 나왔다. 상당히 추웠다. 이 지역 사람들은 송화호에 올 때, 이렇게 짧게 있지 않고, 콘도를 빌리거나 해서, 하루밤을 지내고 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 관계상 생략하고 돌아고게 되었고, 송화호는 연인들과 가족이 많이 나들이를 왔다. 그리 넓다고 생각이 되지 않았는데, 한시간이나 가야 섬이 나오는 걸로 보아서 상당히 큰 것 같다. 역시 중국은 넓다. 배값이 아마 20원 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돌아와서,
북경식 식당
저녁을 북경식 식당에서 먹고 해산해서, 자유시간을 즐기고 밤 9시30분에 연기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다. 잉워로 가게 되었는 데 앉아가는 것이다. 한국의 통일호와 비슷한데 쿠션의 면에서 부족하다. 3시간은 카드놀이하면서 보내고 나머지 시간은 자면서갔다. 잉워는 힘들다고 하는데 힘들다고 생각하면 힘들고, 괜찮다고 생각하면 괜찮은 것같다.
최악의 잉워,ㅡㅜ(마이클과 명섭형 지친 저 모습)
역시 모든 것은 자신의 생각하기 나름인 것인 가보다, 사람들이 행복을 찾음에 작은 인식의 변화에 행복이 될 수도 있고 슬픔이 될 수도 있고 한 것을 보면, 스스로의 자각 속에 조금의 기울임만으로도 우리는 커다란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제 다시 연길역에 도착했다. 이렇게 노동절의 기간동안 짧지만 즐거웠던 여행은 끝나게 되었다.
<여행...>
이번 여행에서 좋았던 것은 두달 동안 배운 중국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록 배운시간은 짧지고, 길림에는 한국어를 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여행을 다니기위한 최소한의 의사소통은 가능한 것이였다. 언어란 자꾸 더 써보고 해야 늘어나는 것인데 잘 그러지 않는 내게도 중국어를 할 기회는 계속 다가왔고 정말 두달 동안 배운 한어의 복습으로 그렇게 좋은 경험도 없을 것이다. 앉아서 공부하는 것에 거의 열배의 복습 효과가 나온 것은 아닌가 한다.
또한 잘 알아듣지 못하면 남방 사람인 줄 아는 것 또한 재미있는 일이였다. 한국 같은 작은 나라에서도 사투리가 심해 서로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이 있는데, 이렇게 넓은 중국에서 그런 경우는 당연하다고 생각이 든다. 하지만, 외국인인 우리를 남방사람으로 알 정도라니, 정말 중국은 넓긴 넓은가 보다. 그 밖에도 일본사람이냐, 연변에서 왔냐, 조선족이냐, 한국사람이냐 하는 많은 질문을 들으니, 우리같은 여행객을 구분하기는 쉽지만은 않은 일인가 보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러시아, 영국, 한국, 중국, 몽고 사람이 같이 하게 되었는데 이것 또한 색다른 경험이 아니였나 한다. 생각하는 것과 즐기는 문화가 사믓다른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학교에서 만났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였다. 한국 교환학생이 많았기에, 한국의 교환학생은 젊어서 여러 곳을 보고, 고생하며, 경험하고 자신의 견문을 넓히고 발전할 수있는 기회로 여행을 다니는 것 같았고, 다른 사람들은 여행을 다니며, 진정으로 여행을 즐기고 명랑하며, 활기차고, 게임을 좋아하며, 지내는 것을 보아, 여행이란 마음의 휴식과 여유를 즐길 수있는 시간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느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저, 느낌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늘 여행을 다니면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으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세 사람이 지나가면 그 들이 모두 네 스승이다.’라는 말이 생각 난다. 이 말을 모두 알고 있겠지만, 세 사람 중 좋은 모습을 보고 배우며, 세 사람 중 좋지 않은 모습은 자신이 그렇게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렇듯 우리가 배울 점은 늘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하물며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가르침을 주는 지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
교환학생으로 중국이란 새로운 곳에 와서, 어찌보면 짧은 시간에 언어보다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여행이 아닌가 한다. 여행을 하며 중국의 과거를 알고, 자연을 알고, 사람을 알고, 살아있는 중국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닌가 한다. 그러하기에 보다 알차고 좋은 계획을 가지고 많은 여행을 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여행을 하며, 많은 것을 보여주고 수고해 주신, 한어선생님인 염준과, 함께 여행을 간 기준, 소정, 정순, 명준, 홍석, 명섭, 데니스, 지현, 무흐에게 즐거운 여행을 해줄 수 있도록 해주어 감사하는 말을 하고 기행을 마치고자 한다.
중국의 헤어짐의 인사 ‘再见’ 늘 길림시와 함께한 친구들과 다시 만나길 기약하며, 단지 헤어짐이 아닌 다시 만나자는 인사가 기억에 남는 저 인사를 하고 싶어진다. 언제고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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