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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5. 조선 후기 농민 봉기, 홍경래의 난, 임술농민봉기

by 소이나는 2014.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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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농민의 항거 1. 농촌 사회의 피폐 - 세도 정치의 폐해, 삼정 문란, 지주 대상인의 횡포 2. 민심 동요 원인1) 채단 발생 2) 비기의 유행 3) 탈춤의 보급 4) 농민의 간도 이주3.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기 위한 정부의 노력 - 암행어사파견, 삼정 이정청 설치 (박규수의 건의) 4. 농민의 대응(1) 소극적 대응 1) 계 - 군포계, 제언계, 농구계 - 어려움 타개 2) 두레(2) 적극적 대응 - 소청, 벽서운동, 민란Ⅶ. 농민의 봉기 - 세도정치 시기1. 홍경래의 난 (순조, 1811)(1) 원인1) 세도정치의 폐해, 서북인에 대한 차별2) 지주제의 모순에 따른 갈등과 대립3) 경제 - 영세 농민, 밀무역•잠채 광업 규제책 시행 (1808)4)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억누르는 중앙의 간섭, 어용상인의 특권 등에 대한 불만이 작용5) 백성에 대한 수령의 지나친 수탈 - 용천, 선천, 가산, 박천, 정주 지방T) 다른 지역보다 많은 사족 층의 수탈 때문이었다? (X) ☞ 이 지역에 사족 층이 형성되지 않음(2) 홍경래 (토호출신), 우군칙 (서얼), 이희저(역노), 김창시(토호)(3) 한때 청천강 이북을 차지하고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5개월 만에 평정(4) 결과 - 농민 항쟁의 선구적 역할 “지금, 임금이 나이가 어려 권세 있는 간신배가 그 세를 날로 떨치고, 김조순, 박종경의 무리가 국가 권력을오로지 가지고 노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 ~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여러 고을의 군후에게 알리노니,절대로 동요하지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관서는 ~ 평안도 놈 ~ 격문 ~”  - 패림 (홍경래의 난)2. 임술 농민 봉기 (진주 민란, 철종, 1862)(1) 원인 1) 경상우병사 백낙신 (白樂莘), 진주목사 홍병원의 탐관오리, 탐학에 저항2) 세도정치 폐해, 지주전호제 모순3) 도결의 확대, 총액제4) 조세 제도 운영에 대해 문제제기, 과중한 부세수탈“진주 고을의 폐단을 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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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써 없애는 계책도 민간에서는 좋아하지 않는 일이다. 게다가 병영의 아전들이 먹어치워 부족해진 환곡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고을 안의 우두머리급 백성을 초청하여 잔치를 열어 꾀기도 하고잡아 가두는 등 위협도 하면서 6만여 냥을 집집마다 이유 없이 징수하였다. 이에 군중들의 감정은 들끓고,많은 사람들의 노여움이 일시에 폭발하였다.” – 진주초군작변등록(2) 괘서, 벽서 등의 형태로 표출되던 농민저항이 전국규모로 폭발한 대표적인 예“근래 부세가 무겁고 관리가 탐학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없어서 모두가 난리 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요망스러운 말들이 동쪽에서 부르짖고 서쪽에서 화답하니 이들을 법률에 따라 죽인다면 백성으로서 살아남을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 혹 흉악하고 반역하는 무리들이 뜻을 잃고 나라를 원망하여 일을 꾸며서 난리를 일으키려고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먼저 유언비어를 퍼뜨려 백성들의 뜻을 어지럽힐 것이다.” - 농민항쟁의 와언 단계(3) 유계춘 중심 ‘백건당(白巾堂)의 난’(3) 내용1) 경상도 단성에서 시작 → 진주로 파급2) 삼남지방 집중, 70개 군현에 달함, 제주도에서도 일어났다.3) 대개 군 단위로 전개되는데 발통, 향회, 정소, 봉기, 관청점령의 과정을 거친다.4) 지방 사족도 농민과 함께 정부에 저항, 지방토호, 몰락 양반, 빈농, 요호부민, 지방 유력자도 참여5) 주로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고 농민층 분화가 진전된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6) 악질적인 아전을 타살하고 관아의 건물을 점령하여 읍권을 장악하는 등 정치적 성향도 있었다.7) 도결의 혁파와 동포제 실시 요구8) 소농•빈농을 이루는 소민들이 부호나 양반 지주를 공격한 경우가 많았다.T) 지주 제도를 개혁하고 신분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X)(4) 안핵사로 박규수를 파견, 삼정 이정청이 설치해 문란을 시정한다고 했지만, 실현되지 못하였다.“이번의 민란은 비록 전례 없는 난이었지만 원래 민심이야 어찌 난을 일으키고자 하였겠느냐? 조정의 영이 여러 번 내려졌으나 백성이 그것을 자세히 알지 못하여 처음에는 등소를 올릴 의논을 하다가 갑자기 거세게일어났던 것이다. 이는 무지와 분별없음에서 나온 일이라. 우리 성상께오서는 항상 백성을 근심하시고 전국의쇠잔함과 삼정의 문란을 애통해 하셨다. 이에 대신들에게 명하여 이정청을 설치하셨다.” – 일성록 (철종)(5) 의의 - 반봉건 정치의식 표출(6) 결과 - 전국적으로 농민항거가 퍼져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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